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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노동자계급이 사회의 전면에 부상하다!

- 87년 노동자대투쟁 1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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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르주아 야당들이 멈춰버린 6월의 바로 그 자리가 노동자계급에게는 독자적 진군의 시발점이 되었다.
6월 민주주의를 넘어서서 노동자 민주주의를 향한 기운찬 행진에서 노동자대중이 먼저 붙잡아야 할 조직적 무기가
무엇인지를 보여주었다. 다름 아니라 민주노조였다.

 

 

 

1987년 한국 사회를 뒤흔든 6월항쟁은 뚜렷한 정치적 대중행동이었다. 하지만 노동자계급의 권력을 수립하기 위한 혁명적 대중행동은 아니었고, ‘독재 타도, 민주(정부) 쟁취’나 ‘호헌 철폐, 직선제 쟁취’에 머문 치명적 한계를 가졌다. 운동의 지도부는 자본주의를 철폐하려는 혁명 전망을 갖춘 노동자계급 지도부가 아니고, 단지 자본주의 체제 아래서 더 많은 정치적 민주주의를 실현하고자 하는 부르주아 세력이었다. 우리 모두가 알다시피, 이들은 지금 부르주아 정당들의 핵심 인물이 되었다.

 

6월 민주화항쟁의 이와 같은 이중성은 새로운 운동을 잉태할 수밖에 없었다. 바로 87년 7․8․9 노동자 대투쟁이다. 군사독재 치하에서 무자비한 탄압에 내몰렸던 노동자들은 6월의 뜨거운 대중행동의 물결 속에서 새로운 경험과 기회를 얻게 되었다. 거대한 대중운동의 힘은 강력한 군대를 거느린 장군들의 도발마저 능히 격퇴할 수 있다는 점, 그리고 군사독재정부가 6월항쟁의 타격을 받고 약화되었다는 점을 확인한 노동자들은 자신감을 갖고 움직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움직일 수밖에 없는 더 결정적인 이유가 있었다.

 

 

 

전진할 것인가 멈출 것인가 - 서로 다른 선택, 운동의 분화!

 

 

마치 장교 없는 군사들처럼, 노동자계급의 고유한 요구를 내건 독립적 지도부 없이 노동자들은 6월항쟁에 자생적으로 참가했다. 가장 격렬한 전투가 벌어진 도처에서 노동자대중은 지도부 없이 헌신적으로 전선을 지탱했다. 그러나 6월 민주화 항쟁이 끝나고 6.29 선언이 발표됐을 때, 노동자들은 허탈할 수밖에 없었다. “과연 노동자들은 무엇을 얻었고, 어떤 미래가 기다리고 있는가?” 저임금, 위험하고 고된 노동은 그대로였고, 현장은 민주주의의 무풍지대였다. 자본가들의 군사적 통제 앞에서 노동자는 아무런 민주적 권리도 행사하지 못한 채 노예처럼 억압당했다. ‘민주항쟁의 승리!’ 도대체 이것은 무슨 말인가!

 

바로 여기서 6월 민주화항쟁의 결정적 한계가 드러났다. 권력 장악 기회를 얻은 김영삼, 김대중 등 부르주아 야당 정치인들은 ‘소기의 성과를 거두었다’면서 승리를 선포하고 운동을 멈추려 했다. 소위 ‘비판적 지지파’들은 이들과 장단을 맞추며, 운동이 가라앉는 것을 방관했다. 그러나 노동자들의 삶에는 어떤 근본적 변화도 없었다. 부르주아 야당들이 멈춘 그 자리에 노동자들이 주저앉을 수는 없었다. 오히려 대담하게 앞으로 전진해야 한다는 점을 노동자들은 본능적으로 감지했다. 여기서 모든 이질적인 세력을 규합했던 6월 민주화항쟁은 분열했다. 그리고 그것은 너무나 정당했다!

 

   

자본가 민주주의냐 노동자 민주주의냐

 

역사 발전의 기회를 능동적으로 붙잡을 수 있는 노동자계급의 혁명적 잠재력은 즉각 모습을 드러냈다. 충분히 준비된 권위 있는 지도부가 없었는데도, 노동자대중은 기회를 붙잡기 위해 대담하게 행동했다. 70년대 그리고 80년대 내내 노동자 운동의 진출을 무자비한 탄압으로 봉쇄하던 자본가 국가권력의 약화를 놓쳐서는 안 됐다. 정치적 지도부가 없는 상황에서 노동자계급의 잠재력은 경제파업으로 폭발할 수밖에 없었다.

 

노동자대중은 껍데기 민주주의를 원한 것이 아니었다. 가난과 실업, 불평등으로 점철된 이 자본주의 체제에 맞서 노동자 생존권을 수호하는 실제 민주주의를 원했다. 그러나 6월항쟁은 이러한 사활적 요구에 아무런 답도 주지 않았다. 노동자들 스스로 그 답은 찾아가야 했다. 그것은 노동자 스스로를 단결시키고 조직적 형태로 규율 잡힌 대오를 형성하며, 노동자의 고유한 자기 요구를 내걸고 투쟁하는 것이었다. 민주적이고 자주적인 노동조합은 노동대중이 그런 과제를 해결하기 위해 붙잡을 수 있는 첫 번째의 무기였다. ‘직선제’로 정점에 도달한 자본가 민주주의에 맞서는 노동자 민주주의가 바야흐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노동자 민주주의의 산물 - 민주노조

 

 

노동자 민주주의를 향한 투쟁은 결코 진공 상태에서 벌어진 것이 아니다. 여러 패배에도 불구하고 노동자들이 스스로의 투쟁을 통해 발견하고 창조한 수단을 통해서만 노동자 민주주의는 활로를 개척했다.

 

70년대에 이어 80년대 초중반에도 운동의 선봉에 굳건하게 서면서 군사독재에 맞선 영웅적 전투를 지속해왔던 청계피복노조, 1980년 4월 사북 탄광노동자들의 항쟁, 84년 여름 대구 택시노동자투쟁, 대우어패럴노조투쟁, 85년 구로동맹파업, 85년 대우자동차파업투쟁 등의 역사적 경험은 6월 민주주의를 넘어서서 노동자 민주주의를 향한 기운찬 행진에서 노동자대중이 먼저 붙잡아야 할 조직적 무기가 무엇인지를 보여주었다. 다름 아니라 민주노조였다. 노동자의 힘을 해체하고 자본가의 수중에서 놀아난 어용노조가 아니라 노동자 스스로의 통제 아래 작동하는 진짜배기 노동조합 말이다.

 

이 민주노조는 자본가들, 그리고 그 정부에 맞선 단호한 투쟁을 통해서만 생존할 수 있었고 노동자들을 하나로 묶어세우고 노동자 자신의 생존권을 쟁취하는 생명줄로 작동할 수 있었다. 파업투쟁이 바로 그 수단이었다. 파업투쟁은 노동자 민주주의의 주먹이었고, 민주노조는 이 주먹을 날리는 데 필요한 모든 에너지를 한 데 모으는 건장한 신체였다. 바야흐로 노동자 민주주의가 찬란하게 떠오르고 있었다. 부르주아 야당들이 멈춰버린 6월의 바로 그 자리가 노동자계급에게는 독자적 진군의 시발점이 되었다! 7·8·9월 노동자 대투쟁의 불길이 솟구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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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7년 당시 현대 노동자들의 투쟁 

 

 

 

울산 노동자들이 신호탄을 쏘아올리다!

 

 

1987년 7월 5일 노동자대투쟁을 알리는 투쟁의 봉화가 솟구쳐 올랐다. 현대엔진에서 현대 계열사 최초로 노조가 만들어진 것이다. 이미 2년 전부터 다양한 현장투쟁을 통해 예열작업을 시작한 현대엔진 노동자들은 때가 왔음을 직감하고, 이를 놓치지 않았다. 현대엔진 노동자들은 6월항쟁의 여운이 전국을 휘감고 있던 7월 5일, 101명이 참가한 노조결성대회를 개최했다. 다음날 점심시간에 식당에서 열린 보고대회에는 1천여 노동자가 참석했고, 노조 설립 5일 만에 생산직 노동자 1,500여 명 거의 전원이 노조에 가입했다.

 

현대엔진노조의 성공적인 건설은 전체 노동자에게 ‘이제 때가 왔음’을 알리는 출격의 신호탄이었다. 불길은 번지기 시작했다. 서로 아무런 직접적 연계가 없었는데도, 노동자들은 그들만의 본능적 신호체계를 통해 하나둘씩 전선에 합류하기 시작했다. 7월 15일에는 현대 미포조선 노동자들이 노조결성대회를 갖고 다음날 보고대회를 열었다. 그런데 노조 설립신고서를 시청에 접수하려는 순간 회사 측이 이를 빼앗아가 버렸다. 이 ‘탈취사건’은 신호탄을 더욱 밝게 만들었을 뿐이다. 이를 계기로 노조결성 소식이 전국에 타전되면서, 노동자들의 자신감과 열기는 전국으로 빠르게 확산되었다.

 

25일, 현대자본은 민주노조의 확산에 대한 공포감으로 어용노조를 급조했다. 그러나 ‘어용노조 물러가라’며 자발적으로 형성된 현대차 노동자들의 시위대열은 공장을 한 바퀴 돌면서 8,000여 명으로 늘어나 일시에 공장 전체를 마비시켰다. 이들은 임시총회를 열어 새로운 민주노조 집행부를 세워 자본으로부터 ‘민주노조를 인정한다’는 각서를 받아냈다. 현대중공업에서도 25일 서명운동을 시작으로, 28일에는 1,500여 노동자들이 어용노조 퇴진과 임금인상을 요구하며 파업을 단행했다.

 

이제 불길은 울산지역 전체를 활활 태우기 시작했다. 26일 현대중전기노조 건설, 27일 태광산업과 동양나일론(현재 효성) 노동자들의 파업, 풍산금속 파업, 30일 현대중공업, 현대중전기 노동자들의 연합 가두시위, 31일 이후 6개 버스업체 파업, 8월 1일 현대정공, 현대종합목재노조 건설, 8월 초 석유화학단지와 온산공단으로 파업농성 확산. 8월 8일엔 현대그룹 노동자들의 총단결 조직인 현대그룹노조협의회(현노협)가 결성되었다. 8월 14일에는 현대중공업 노동자 15,000여 명이 임시총회를 갖고 어용노조를 99%의 불신임으로 몰아내고 민주노조를 세웠다.

 

이 모든 일이 불과 40여 일 사이에 일어났다! 노동자의 위대한 조직적 능력은 이처럼 단숨에 모습을 드러냈다. 하지만 1987년 7월에 폭발한 노동자계급의 힘은 이제 막 자신을 드러내기 시작했을 뿐이다!

 

이주헌

(다음호에 2부가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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