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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항쟁을 계승하고, 노동자대투쟁에 길을 터준

87년 6월항쟁

 

 

 

6월항쟁 당시 시청광장에 모인 시위인파.

 

 

 

광주에서 수천 명을 죽이고 정권을 잡은 전두환은 집권 기간 내내 장기집권 음모를 꾸몄다. 그럴수록 민중의 저항의지는 한층 높아져 갔다. 그런 상황에서 경찰이 서울대생 박종철 군을 고문하다 죽인 사건이 터졌다. 정권은 평소대로 사건을 얼버무리려 했다. 심문을 시작한 지 30분 뒤 책상을 ‘탁’치니 ‘억’하고 죽었다고 경찰이 발표했다. 하지만 이런 속임수는 하루 만에 들통 나고 말았다. 부검 결과 수십 군데에 피멍 자국이 있었고, 전기고문과 물고문 흔적도 뚜렷했다.

 

 

6월항쟁의 불꽃이 타오르다

 

이후 고문치사 규탄투쟁이 거세게 타올랐다. 대통령 간접 선거제를 계속 유지해 광주학살 동료인 노태우에게 권력을 승계하겠다는 4.13 호헌 조치를 전두환이 발표하자 대중의 분노는 더 거세졌다. 항쟁의 기운이 한창 무르익어가던 중, 폭력경찰이 6월 9일 연세대생 이한열 군에게 최루탄을 직격으로 쏴 사경을 헤매게 만드는 사건이 벌어졌다.

 

6월 10일 잠실 체육관에서는 노태우를 민정당 대통령 후보로 선출하는 ‘체육관 선거’가 열렸다. 같은 날 전국 22개 도시에서 24만 명이 전두환 독재정권을 규탄하는 대규모 국민대회와 시위를 벌였다. 폭력경찰이 집회를 원천봉쇄했지만, 강력한 조직력과 투쟁력을 갖춘 학생과 일부 선진노동자들이 투쟁의 돌파구를 열자 수많은 시민이 집회와 시위에 동참했다.

 

 

노동자의 비타협성

 

이날 집회를 주최한 것은 국민운동본부였다. 국민운동본부에는 노동자민중 단체도 있었지만, 김대중, 김영삼 같은 부르주아 정치인도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그래서 국민운동본부 지도부는 단순한 항의 차원의 하루 집회 이상을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노동자민중은 이번 기회에 전두환 정권을 엎어버려야 한다고 생각하고 투쟁을 지속시켜 나가야 한다는 강한 열망을 갖고 있었다. 그래서 명동성당 농성에 들어갔다. 그리고 농성을 깨뜨리려는 폭력경찰에 맞서 맹렬한 전투를 치렀다. 결국 5일 만에 다수결에 따라 농성을 해산했지만, 노동자들이 비타협적 전투성을 보여줬다는 점은 의미심장하다.

 

“끝까지 비타협적으로 투쟁할 것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대체로 불현듯 뛰어든 평범한 시민들이었다. 이들 중에는 전 재산인 손수레를 맡겨 놓고 들어온 노점상, 노동자, 술집 웨이터, 구두닦이, 그리고 부산‧광주 등에서 올라온 막노동자들이 상당수 포함되어 있었다. 밑바닥 인생을 살아온 이들은 투쟁에 참여한 순간 그 동안 맺힌 한이 폭발하면서 이 기회에 뒤엎어 버리고야 말겠다는 의지에 휩싸였던 것이다.”(<다시 쓰는 한국현대사>, 박세길)

 

 

계엄령과 군대 투입 협박

 

민중의 투쟁 열기는 갈수록 높아져 6월 18일에는 전국 16개 도시에서 150만 명이 거리를 가득 메웠다. 전두환 정권이 10만의 경찰을 투입하고 1,500여 명을 연행했지만, 오히려 곳곳에서 시위대가 경찰을 무장해제하는 일이 벌어졌다.

 

전두환 정권은 80년에 광주에서 했던 짓을 되풀이하려 했다. 시위를 진압하기 위해 군대를 투입하려 한 것이다. 군대 투입설이 언론에 보도되고, 부산 등 일부 도시에서는 군용 헬기와 정찰 비행기가 날아다니기도 했다. 19일 오전 전두환 정권은 안보장관회의 등을 잇달아 열고 계엄령 선포 가능성을 시사하는 담화문을 발표했다.

 

이런 군대 투입 움직임에 국민운동본부 지도부는 상당히 불안해했다. 하지만 분노한 민중은 크게 동요하지 않았다. 오히려 군대가 투입되면 단호하게 맞서야 한다는 의지가 강했다.

 

 

커져가는 항쟁의 불길

 

항쟁은 눈덩이처럼 불어나고 있었다. 시위 경험이 거의 없고, 시위 주도세력도 극히 미미했던 안양에서 벌어진 19일 시위가 이 점을 잘 보여준다.

 

“6월 19일 저녁 8시 30분, 주로 노동자로 구성된 시위대 50명 가량이 안양의 번화가인 1번가 인도를 따라 구호를 외치며 나가기 시작하자 주변에 배치되어 있던 2백여 명의 경찰들은 시위대의 숫자가 적은 것을 얕보고 전원을 체포하려고 달려들었다.…(하지만) 인도는 발걸음을 멈춘 시민들로 점점 들어찼으며 마침내 도로 한복판으로 쏟아져 나와 삽시간에 도로를 가득 메우고 전경대를 에워싸 버렸다. 이때가 9시 30분경. 1만여 명에 이르는 시민들이 도로에 앉아 대중집회를 시작하였다.”(<말> 87년 8월호)

 

군대 투입 위협에 맞서 가장 과감하게 투쟁한 이들은 부마항쟁의 주역인 부산시민들이었다. 6월 8일부터 13일까지 가톨릭센터에서 광주항쟁비디오 상영 및 전시회가 열렸는데, 연인원 6만여 명이 참여해 광주항쟁의 진실을 알고 결사항전의 정신을 가슴에 새겼다. 군대 투입 소문이 파다했지만, 부산의 시민‧학생들은 두려움을 박차고 거리로 몰려나왔다. 약 30만의 시민‧학생들이 부산 서면에서 부산역에 이르는 4킬로미터의 도로를 완전히 장악하고 시위를 벌였다.

 

노동자들은 대형트럭, 트레일러 10여 대를 앞세우고, 200여 대의 택시를 가세시켜 시청으로 돌진하는 등 과감한 투쟁을 벌여 도시 전역을 해방구로 만들어버렸다. 이런 부산시위가 밤낮을 가리지 않고 여러 날 계속됐다.

 

부산의 대규모 항쟁은 전국적으로 커다란 파급 효과를 미쳤다. 특히 광주에 준 영향은 매우 의미심장했다. 1980년에 고립돼 처참하게 학살당한 경험이 있는 광주민중은 87년에도 똑같은 비극을 겪을지 모른다는 두려움을 느끼기도 했다. 하지만 부산항쟁에서 용기를 얻고, 20일에 10만에 이르는 시민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26일엔 30만 명이 거리를 가득 메웠다.)

이런 열기가 모여 6월 26일에는 전국 34개 도시에서 1백만 명이 참가하는 대규모 시위가 벌어졌다.

 

 

전두환 정권의 기만적 항복

 

만약 전두환 정권이 80년 광주에서처럼 군대를 투입했다면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 전국 곳곳에서 무장항쟁이 벌어졌을 것이다. 80년 광주항쟁 때 향토 31사단이 무력진압을 거부했던 것처럼, 군대 안에서 반란이 일어날 수도 있었다. 이 점을 간파하고 전두환 정권은 결국 군대 투입을 포기했다. 대신 ‘대통령 직선제’를 골자로 한 기만적인 ‘속이구’ 선언(6.29 선언)을 통해 사태를 수습하려 했다.

 

7월 2일 죽은 이한열 군을 추모하는 7월 9일 1백만 장례시위를 끝으로 6월항쟁은 막을 내렸다.

 

 

6월항쟁의 역사적 의미

 

6월항쟁은 표면상 1960년 4월혁명과 엇비슷했다. 하지만 4월혁명 때 한국 노동자민중은 군부의 총칼에 맞서 싸울 각오가 돼 있지 않았다. 그래서 5‧16 군사쿠데타가 일어나자 아무 저항도 하지 못하고 무릎을 꿇어야 했다. 하지만 광주민중항쟁을 경험한 뒤 노동자민중은 군부의 총칼에 단호하게 투쟁할 결의를 다질 수 있었다.

 

6월항쟁은 광주항쟁을 계승하면서도, 그 한계를 성큼 뛰어넘었다. 지역적 고립이라는 광주의 비극을 6월 전국항쟁은 깨끗이 날려버린 것이다. 6월항쟁은 87년 7‧8‧9노동자대투쟁의 산파였다. 노동자들은 군사정권이 허약해진 틈을 이용해 역사의 무대에 당당히 뛰어올랐다.

 

박인국

 

[주요 참고자료: <다시 쓰는 한국현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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