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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재인 지지투표방침의 약점

- 다함께의 반론에 대한 비판

 

 

 

 

 

 

지난 대선에서 문재인에게 표를 던지자는 ‘다함께’의 주장과 달리 우리는 독립적인 노동자후보에게 표를 던지자고 주장했다. 그 과정에서 다함께에 대한 짧은 비판적 언급이 있었는데, 그에 대한 반론이 ≪레프트21≫에 실렸다(“혁명가와 2012 대선”). 대선이 끝났기 때문에 이번 투표전술 자체에 대한 논쟁을 이어가는 건 큰 의미가 없을 것이다. 이 문제를 다루는 건 이번에 나타난 쟁점이 단지 18대 대선에 한정된 것이 아니라 여러 사안에서 반복적으로 나타나기 때문이며, 부분적으로나마 이 쟁점에 대한 우리의 입장을 정리해둘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지지’의 문제

 

반론을 쓴 다함께 허수영 동지는 우리가 다함께를 마치 ‘문재인 지지그룹’인 것처럼 “둔갑”시키는 “완전한 왜곡”을 감행했다고 불평하는 데 많은 지면을 할애한다. 우리 신문에 실린 기사에서는 다함께의 투표방침에 대해 “말로는 혁명적 정치를 떠벌리지만 행동으로는 문재인 지지를 호소하는” 것이라고 규정했다. 즉 다함께의 조직 성격이 아니라 전술적 태도에 대해 문제 삼고 있다. 이것을 마치 우리가 다함께의 조직 성격에 대해 문재인 지지그룹으로 규정하기라도 한 것처럼 자의적으로 읽은 뒤 화를 내는 모습은 썩 좋지 않다.

 

당연한 말이겠지만 우리는 다함께가 문재인 지지그룹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만약 다함께에 대해 문재인 지지그룹이라고 여겼다면, 그런 다함께가 자기 성향에 따라 문재인에게 투표하자고 주장한 것에 대해 굳이 문제 삼을 이유가 있겠는가? 그러니 허수영 동지가 반론의 전반부에서 다함께는 문재인 지지그룹이 아니라는 점을 애써 설명한 건 불필요한 일이었다.

그래도 어쨌든 ‘행동으로는 문재인 지지를 호소하는’이라는 우리의 표현이 기분 나쁠 수 있다. 이 점에 대해서 차분하게 정리해보자. 투표는 단지 자기 마음속에 어떤 신념을 간직하는 문제가 아니라 특정한 의견을 표출함으로써 타인들에게 사회적 영향력을 미치고자 하는 행위다. 물론 다함께가 일반적인 선전에서는 모든 자본가정당과 선을 긋고 규탄하는 입장을 취한다는 건 아주 잘 알고 있다. 그래서 ‘말’의 문제를 다루는 것이 아니라, 선거에서 실제로 어떤 행위를 촉구하고 있는가를 논점으로 삼는 것이다. 이 지점에서, 다함께는 분명히 문재인에게 표를 던지는 행위를 촉구했다. 안 그런가?

 

표를 던지는 건 정치적으로 충분히 지지하기 때문에 할 수도 있지만, 정치적으로 불만족스럽거나 사실상 동조할 수 없는 경우에도 상황에 따라 할 수 있다. 후자의 경우는 ‘비판적 지지’가 된다. 만약 누군가 “우리는 지지가 아니라 단지 표를 던지는 것뿐인데요?”라고 반문한다면, 그건 말장난에 불과하다고 이야기해줘야 한다. 뭔가를 지지한다는 건 그 대상을 밑에서, 뒤에서 또는 옆에서 떠받쳐주는 것이다. 선거에서 표를 던지는 게 그 대상이 다수표를 획득하도록 뒷받침해주는 게 아니면 무엇인가.

 

이 점은 ≪레프트21≫의 다른 기사에서도 확인된다. ≪레프트21≫의 ‘추천기사’로 게재된 존 몰리뉴의 “혁명적 마르크스주의자들의 선거전술 가이드”를 들여다보자. 존 몰리뉴는 “우리가 선택하지 않은 상황, 즉 포괄적으로 정치적 지지를 할 수 없는 상황에서 선택”을 할 때에는 “비판적 지지라는 개념이 핵심”이라고 설명한 뒤, 레닌이 영국에서 자본가정당들에 맞서 노동자당에게 투표하라고 주장한 사례를 인용한다. 레닌은 당시 영국 노동당 지도자들이 얼마나 부패했고 반동적인가를 잘 알고 있고 정치적으로 지지하지 않으면서도, 계급투쟁의 발전을 위해 경우에 따라 노동당에 “의회적 지지를 줘야 한다”고, 즉 표를 던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런 주장의 기본 조건 중 하나는 노동당이 비록 혁명정당은 아니지만 노동자계급에 기반을 둔 노동자당(부르주아적 노동자당, 자본주의적 노동자당)이라는 점이다.

 

존 몰리뉴는 말한다. “이런 분석 위에서 레닌은 영국 부르주아지의 주요 정당들(예컨대 보수당과 자유당)에 맞서 영국 노동당에 ‘투표로 지지’하라는 주장을 펼쳤다.” 즉 정치적으로 지지하는 경우(혁명정당의 후보)든 지지하지 않는 경우(부르주아적 노동자당의 후보)든, 표를 던지자고 호소하는 것은 모종의 지지를 조직하는 것이다. 그래서 누군가에게 표를 던지거나 투표하자고 제안할 경우, 그것이 완전한 지지인지 비판적 지지인지 분명히 하면 된다. 존 몰리뉴가 ‘투표로 지지’한다는 표현을 쓴 것처럼, 다함께의 주장은 문재인에 대한 비판적 지지 입장이었다. 그 점에서 허수영 동지의 반론은 궁색한 느낌을 준다.

 

자본가정당에 대한 비판적 지지?

 

다함께는 과거에도 김대중이나 조순에 대해서도 비판적 지지 입장을 취했었기 때문에, 이번 대선에서 문재인 투표방침을 선택한 게 특별히 낯설지는 않다. 그리고 앞으로도 때때로 이런 모습을 되풀이해서 보게 될 것 같다. 대선 결과에 대한 다함께의 성명서 “18대 대선 결과는 무엇을 보여 줬는가”에서도 “진보진영은 불가피한 특정 상황에서 민주당과의 연대 가능성을 미리 배제할 수는 없”다고 다시 한 번 여지를 열어 놨다.

 

이런 주장을 정당화하기 위해 다함께는 레닌을 열심히 인용한다. 특히 존 몰리뉴의 기사에도 인용된 바 있는 ≪좌익소아병(좌익공산주의 - 유아적 혼란)≫이 대표적이다. 다함께 동지들이 적극 추천하는 것처럼 ≪좌익소아병≫은 혁명의 전략 전술을 배우는 데에서 매우 중요한 책이다. 지금의 논점과 관련해서는 영국의 선거에서 당시 공산당이 어떤 태도를 취해야 했는가 하는 대목을 눈여겨 볼 필요가 있다. 거기에서 레닌이 비판적 지지의 대상으로 거론한 대상은 노동당이었다. 자본가정당들과의 계급적 경계선을 명확히 만들어내고 계급투쟁을 촉진하기 위한 전술적 타협이다.

 

그런데 다함께는 이 전술적 타협 즉 ‘노동자계급 내의 개량정당에 대한 타협’의 문제를 ‘자본가정당(민주당)에 대한 타협’의 문제로 슬쩍 ‘치환’한다. 계급적 경계선의 중요성에 대해 모를 리 없는 다함께가 어찌된 일인지 이 대목에서만큼은 그 경계선을 흐릿하게 지워버리고, 개량주의에 물든 노동자당과 민주당 같은 자본가정당을 같은 반열에 올려놓는다. 다함께의 입장은 이런 잘못된 전제로부터 잘못된 결론을 끌어내는 경우다.

 

만약 한국의 노동자들이 여전히 의회정치의 실체를 경험해보지 못했다면, 자본가정당들이 집권한 결과가 무엇인지 모른다면, 자본가정당들 중에서도 이른바 자유주의 분파(실체 없는 유령들)의 집권을 맛보지 못했다면, 요컨대 아직도 이 나라 노동자들 앞에 부르주아혁명이라는 과제가 놓여 있다면 상황에 따라 자본가 분파들과의 협력 문제가 ‘거론’될 수도 있다. 레닌과 볼셰비키도 러시아에서 부르주아혁명 시기를 거치고 있는 동안에는 자유주의 부르주아들과 일시적 협력을 (대부분 자유주의 부르주아들의 허약함과 비겁 때문에 큰 성과는 없었지만) 고려했다. 아주 초기에 있었던 ‘합법 맑스주의자들과의 동맹’ 같은 극히 일시적이고 부분적인 형태로 말이다. 하지만 자유주의 부르주아들의 허약함과 비겁과 반동성 때문에, 1905년 혁명기만 되도 자유주의 부르주아들에 대한 레닌의 태도는 이미 매우 적대적이었다. 레닌은 당시 러시아의 부르주아혁명을 위한 자유주의자들과의 공동정부나 연대 같은 건 말할 것도 없고, 1906년 두마의회선거에서의 협력조차도 딱 잘라 거부했다.

 

자, 이건 부르주아혁명 시대의 이야기다. 그런 시대에나 그런대로 봐줄만 했던 (사실은 그런 상황에서도 거의 눈뜨고 봐주기 힘든) 자본가정당과의 연대 관점을 21세기 한국에서 꺼내드는 건 완전한 시대착오적 발상이다. 러시아의 경우, 1917년 2월에 부르주아혁명이 일어나고 새로운 세력관계가 만들어지자 레닌은 새로운 상황에 조응하기 위한 새로운 입장을 제기한다(‘4월 테제’). 노동자들의 불충분한 계급의식과 조직화 때문에 자본가들에게 권력을 쥐어준 혁명의 첫 번째 단계로부터 이제 노동자계급이 직접 권력을 쥐어야 하는 두 번째 단계로 나아가야 할 전환점에 도달했다는 것이다.

 

자유주의 부르주아들은 어떤 식으로도 더 이상 제휴와 연대의 대상이 될 수 없었다. 자본가세력에게 어떤 신뢰도, 어떤 지지도 보내지 않는 것이 필요했다. 레닌은 당시 수많은 대중이 갖고 있던 부르주아 임시정부에 대한 불합리한 신뢰나 부적절한 정치전망(이를테면 ‘혁명적 방위주의’)에 대해 결코 타협하지 않았으며, 당원들에게도 결코 타협하지 말 것을 촉구했다. 오히려 다수 대중의 경험 속에서 자신의 견해를 변화시킬 수 있도록 끊임없이 비판하고, 설명하고, 설득하는 방법을 취했다.

 

즉 레닌은 다함께 동지들이 강조하듯이 ‘대중과 어떻게 관계 맺을 것인가’에 주목했는데, 수많은 대중을 감염시킨 자유주의 부르주아적인 ‘민주주의’ 정서를 그대로 따르는 방식의 관계 맺기가 아니라 오히려 그 정서에 “식초와 담즙을 뿌리는 방식” 즉 쓰디쓴 비판을 끈기 있게 제기하고 설명과 설득을 포기하지 않는 방식을 취했다(레닌, “우리 혁명에서 노동자계급의 임무”). 요컨대 박근혜를 저지하기 위해 문재인을 밀어주려는 노동자들과 ‘소통’하기 위해 사회주의자들이 스스로 문재인이라는 자본가정당 대표자를 지지(의회적 지지, 투표로 지지)할 이유는 없다.

 

레닌의 주장을 직접 들어보자.

 

“(소비에트로 결집한 대중이) 부르주아의 영향에 굴복할 때 우리의 임무는 그들의 전술적 오류를 끈기 있게, 체계적으로, 집요하게 설명하는 것, 대중의 실천적 요구에 특별하게 부응하는 방식으로 설명하는 것이다.” “우리가 소수파인 한 우리는 오류를 비판하고 폭로하는 작업을 수행한다. 동시에 국가권력 전체를 노동자 대의원 소비에트로 옮길 필요성을 설명한다. 그래야 인민이 경험으로 자신의 오류를 극복할 수 있다.”(4월 테제)

“혁명적 방위주의를 믿는, 대중 가운데 폭넓은 층들의 의심할 수 없는 정직성을 고려할 때, 그들이 부르주아에게 기만당하고 있다는 사실을 고려할 때, 특별히 철저하고 집요하고 끈질기게 그들에게 그들의 잘못을 설명하는 것 … 이 필요하다.”(같은 글)

 

다함께의 주장대로라면 이 때 레닌은 ‘대중 가운데 폭넓은 층들’과 ‘소통하고 연대’하기 위해 우선 대중의 관점을 ‘지지’해야 했을 것이다. 그것이 다함께의 정치다. 레닌의 정치는 완전히 달랐다. 대중이 “경험으로 자신의 오류를 극복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라도, 끈기 있게 설명하고 비판하는 작업의 중요성을 전면에 내세운다. 다함께가 자신들의 관점을 고수하는 건 그들의 자유다. 하지만 더 이상 레닌을 괴롭히지는 말자.

 

실제로 문제가 되는 것

 

다함께가 문재인에 대한 비판적 지지입장을 선택한 이유는 “박근혜 저지를 염원하는 수백만 노동대중과 소통하고 연대하기 위해서”였다. 그렇게 하는 것이 박근혜가 당선되는 경우보다 투쟁을 건설하는 데 유리하다고 판단하는 것이다. 그러다보니, 시대에 걸맞지 않게 자본가정당 지지투표를 호소하는 것도 문제지만, 또 다른 문제가 이어진다.

 

대선 투표에 관한 다함께의 성명(“박근혜를 막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문재인에게 투표하는 심정에 공감한다, 하지만 아무런 환상도 없어야 한다”)은 이렇게 말한다. “(문재인에게 투표하려는) 노동자들에게 박근혜와 문재인이 다를 게 없다고 말해서는 안 된다. 4월혁명을 짓밟은 5·16반혁명이 ‘구국의 혁명’이라고 말하고 유신독재를 미화하는 사람과 그걸 비판하는 사람을 대다수 노동자들이 똑같이 볼 리는 없다. … 이것은 타협이지만 불가피한 타협이고, 박근혜는 반드시 막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노동자 대중과 소통하며 그 속에서 좌파들의 힘과 조직을 키우기 위한 타협이다.”

 

대중을 설득하기 위해서라도 우선 대중의 정서를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다함께의 태도는 훌륭한 것이다. ‘이해’하는 것을 넘어서 대중의 정서를 그대로 받아들이는 순간부터 다함께의 태도는 무분별한 것이 된다.

 

다함께의 진단처럼, 상당수 노동자들의 눈에 구국의 혁명 운운하는 새누리당 세력과 그걸 비판하는 민주당 세력은 달라 보인다. 이 때 우리가 해야 할 말이 다함께가 암시하는 것처럼 “맞다, 박근혜와 문재인은 분명히 다르다”는 것인가? 만약 우리가 러시아혁명에서 배운 게 있다면, 그런 결론을 끌어내서는 안 된다. 거꾸로 우리는 “박근혜와 문재인은 다를 게 없다”고 분명히 말해야 한다. 다함께처럼 이 때 “박근혜와 문재인이 다를 게 없다고 말해서는 안 된다”는 입장을 취한다면, 의도가 어떤 것이었든(다함께는 그 의도에서는 절대로 민주당에 대한 환상을 부추기려고 하지 않는다) 결과적으로 대중이 갖고 있는 문재인에 대한 환상을 인정하고 부추기는 결과를 낳게 된다.

 

게다가 다함께는 대선 투표 관련 성명에서 스스로 인정하고 있는 것처럼 “이미 민주당 정부 10년의 배신을 경험한 노동자들은 문재인이 차악이라는 것을 뻔히 알기에 내키지 않는” 상태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런데도 박근혜와 문재인은 다르다는 선동을 제출하는 건 오히려 대중의 경험과 그 결과를 지워버리고, 노동자의 의식을 ‘끌어내리는’ 효과를 낳을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꽁무니주의’라는 표현을 사용하는데, 이것 역시 다함께 동지들에게는 불쾌한 모양이다.

 

백 보 물러나서 보더라도, 다함께 식의 접근이 이후 투쟁을 건설하는 데 도움이 되는지도 의심스럽다. 누구나 잘 알고 있듯이 이번 대선에서 새누리당과 민주당 중 누가 당선될 건가는 매우 불투명했다. 우리의 삶을 엉망진창으로 만들어버린 새누리당 정부에 대한 대중의 반감도 강했지만, 뭐 하나 제대로 해결하지 못하고 새누리당 만큼의 쇄신 ‘액션’도 취하지 못한 민주당 역시 대중에게 불신의 대상이었다. 선거운동 기간에도 민주당은 내내 비실거리는 모습을 보였다. 그런데도 박근혜와 문재인은 다르다면서 근거 없는 기대감을 부추긴다면, 만약 문재인이 당선되지 않을 경우 그런 부추김이 곧장 실망과 좌절로 바뀔 수밖에 없다. 근거 없는 희망은 근거 없는 절망으로 바뀐다. 지금 상황이 정확히 그런 상황이다. 물론 현재 사회주의조직들의 규모와 영향력이 워낙 작기 때문에, 대중의 정서가 이렇게 흘러가는 것에 대해 다함께를 탓하는 건 부당하다. 하지만 사회주의조직들이 지금 어떤 태도를 취해야 미래에 올바른 구실을 할 수 있는가 하는 점에 대해선 분명히 문제 삼아야 한다.

 

정세적 과제

 

2012년을 관통하면서 정세적으로 매우 중요하게 대두된 문제는 노동자계급의 독립적인 정당을 건설하는 문제였다. 노동자운동에서 당 건설은 일반적으로 항상 중요하지만, 이른바 통진당 사태를 겪으며 그간의 노동자 정치세력화운동 성과가 뭉개지는 상황이 이 과제를 한층 더 절박하게 만들었다. 그런 필요성을 반영해 변혁정당 건설을 추진하는 흐름이 등장했고, 우리는 이 흐름에 주목하고 있었다.

 

그런데 새로운 노동자계급정당 건설의 흐름이 제대로 궤도에 오르기도 전에 대선 개입 문제가 불거져 나오고, 부실한 과정을 거쳐 노동자후보운동이 진행됐다. 그러면서 애초의 화두였던 노동자계급정당 건설 전망은 선거운동 기간 내내 지워졌다(투표 전날이 돼서야 비로소 노동자계급정당에 관한 이야기가 언급됐다).

 

그럼에도 우리는 독립적인 노동자후보에 대한 투표방침을 결정했다. 김소연 선본과 김순자 선본은 여러 정치적 약점과 과정에서의 문제점에도 불구하고, 민주노동당에서 통합진보당으로 이어지는 일관된 야권연대세력과 달리 자본가정당과의 단절 입장을 대체로 고수했다. 노동자계급의 독립적인 정당을 건설하는 데에서 모든 자본가정당과의 단절이 갖는 중요성을 고려할 때, 이들에게 비판적 지지를 보내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다함께는 “(대중의) 정서가 진보 후보에 대한 강력한 지지와 투표로 나타나기는 힘들 것이다. 주류 양강 구도, 진보정당의 분열과 위기 때문에 진보 후보들은 대중의 시야에서 가려져 있다”고 말한다(대선 투표 관련 성명). 이런 사실판단 자체는 우리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우리는 실제 득표 결과에 연연하지 말고, 오직 대선 이후 노동자계급정당 건설의 의지를 모아나가자는 관점에서, 그런 결의의 출발점으로 모든 자본가정당과 단절하고 독립적인 노동자후보에게 표를 던지자고 촉구했다.

 

다함께와 우리 사이에 차이는, 독립적인 노동자후보들이 “대중의 시야에서 가려져” 있는 상황에서 문재인 투표방침을 채택함으로써 더 확실하게 대중의 시야에서 사라지게 만들 것인가, 아니면 문재인에 대한 환상에 “식초와 담즙을 뿌리고” 독립적 노동자후보에게 투표하자는 방침을 채택함으로써 새로운 대안에 대한 고민의 씨앗을 퍼뜨릴 것인가 하는 점이다.

 

물론 우리가 독립적 노동자후보에게 투표할 것을 촉구하더라도 문재인에 대한 환상을 갖고 있던 노동자들이 즉각 우리 쪽으로 돌아서지는 않을 것이었다. 하지만 적어도 이미 박근혜와 문재인 모두에 대해 더 이상 환상을 갖고 있지 않은 노동자들, 독립적인 노동자후보를 중심으로 자기 대열을 지키려는 노동자들을 지지하는 건 미래의 변화를 위해 중요하다. 이런 노동자들이 대열을 유지할 수 있다면, 더 큰 투쟁과 대중적 정서 변화의 계기가 주어질 때 이 노동자들이 주도적인 역할을 할 수 있다. 반대로 이런 노동자들까지도 문재인 지지투표 방침으로 해산시켜버린다면, 미래의 투쟁을 조직하고 이끌어갈 초점은 사라져버린다.

 

중요한 건 다음 발걸음

 

이미 대선은 끝났다. 우리는 독립적인 노동자후보에게 투표하는 방침이 옳았다고 여기지만, 이 방침이 실제로 결실을 맺을 수 있으려면 투표 자체가 아니라 그 이후의 발걸음이 성공적으로 이뤄져야만 한다. 문재인·안철수 같은 자본가세력들조차도 자신들의 신당 창당 문제를 쟁점으로 만들어내는 상황에서, 새로운 노동자계급정당 건설 과제를 선거운동 기간 내내 묻어버린 건 치명적인 약점이었다.

 

독립적인 노동자후보에 대한 투표방침은 더 이상 자본가정당들에게도, 개량정당들에게도 매달리지 않는 독립적인 노동자계급정당, 전투적 노동자당 건설운동으로 이어져야 한다. 아마도 다함께는 당 건설과 관련해서도 우리와는 다른 길을 갈 듯하다. 하지만 지금 그 문제에 관해 다함께와 논쟁할 필요는 없다.

유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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