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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프로스 구제금융 - 격화되는 유럽 경제위기의 한 꼭지점

 

 

 

 

키프로스(이투데이).jpg

 

 

키프로스 사례가 보여주는 것. 하나, 앞으로 경제위기 대처 과정에서 국가 간 갈등과 대결이 심해질 것이라는 점.

둘, '예금주 보호'라는 금기사항을 건드릴 정도로 유럽과 세계의 경제위기가 깊어지고 있다는 점. (사진_이투데이)

 

 

유럽과 세계 경제가 동지중해에 자리한 작은 섬나라 키프로스의 구제금융 문제로 다시 한 번 크게 뒤흔들렸다. 최근 키프로스 사태는 유럽과 세계 경제위기가 훨씬 더 심각한 국면에 들어서고 있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주었다.

 

 

그리스 채무 삭감으로 거덜 난 조세회피국 키프로스

 

키프로스는 인구 80만에다가 GDP가 유럽연합의 0.2%밖에 되지 않는 아주 작은 나라다. 키프로스의 주된 산업은 관광과 금융인데, 특히 낮은 세율로 조세회피국이 됨으로써 GDP의 8배가 넘는 1,500억 유로까지 예금을 유치했다.

 

막대한 현금을 굴리던 키프로스 은행들은 유럽 경제위기가 장기화하면서, 특히 그리스에 투자한 채권이 부실화하면서 존폐의 기로에 내몰렸다. 2011년 하반기 유럽중앙은행 등이 그리스 국가부채 위기를 완화하기 위해 민간 채권자들에게 채무삭감을 강제한 것이 결정적 계기였다. 그리스 국채를 50억 유로 이상 사들였던 키프로스 은행들은 투자금의 80%가 넘는 42억 유로를 잃었다. 게다가 기업과 가계에 대출해 준 220억 유로 또한 대부분 악성채권이 되었다.

 

공산당이 주도하던 ‘좌파’ 정부는 러시아에서 25억 유로를 급하게 빌렸지만 턱없이 부족했다. 결국 공공부문 임금삭감과 사회복지 축소 등의 긴축정책을 실시하면서 유럽연합의 구미를 맞추다가 2012년 7월, 170억 유로의 구제금융을 신청했다. 그리스, 아일랜드, 포르투갈, 스페인에 이어 다섯 번째다.

 

 

예금주들이 구제금융 일부를 떠안아라?

 

유럽연합 등과 키프로스의 구제금융 협상은 지루하게 늘어졌다. 그러다가 올 2월 대선에서 우파 후보 아나스타시아데스가 57.5%라는 역대 최고 득표율로 당선되자 2주 만에 합의안이 전격 도출됐다.

 

3월 16일 유럽연합 정상회의는 키프로스에 100억 유로의 구제금융을 제공하기로 결정했다. 대신 부족분 58억 유로는 키프로스 은행들에 예치된 예금에 과세를 함으로써 해결하라는 조건이 붙었다. 전례 없는 조치였다.

 

키프로스 정부는 10만 유로 이상 예금에는 10%, 그 이하 예금에는 6.75% 과세하는 내용의 구제금융안을 의회에 제출했다. 반대 여론이 폭발적으로 들끓는 가운데, 19일 의회는 반대 36표, 기권 19표로 부결시켰다. 여당 의원들조차 모두 기권하면서 찬성이 1표도 나오지 않았다.

 

24일 유럽연합과 키프로스 정부는 새로운 합의안을 마련했다. 은행 예금 과세 대신 양대 부실은행을 통합해 채무를 조정하면서 10만 유로 이상 예금주들도 손실을 부담하게 하는 방안이 마련되었다. 예금주들은 예금의 40% 정도를 잃게 될 것으로 예상됐다. 사유화 프로그램, 세금 인상, 자본이동 통제, 현금인출 제한 등의 조치도 포함됐다.

 

이 합의안은 명목상 예금주 과세 방안이 빠졌다는 이유로 의회 표결 없이 바로 시행에 들어갔다. 28일 은행들이 영업을 재개하면서 키프로스 사태는 일단 진정 국면으로 넘어갔다.

 

 

예금주 과세 방안은 왜 등장했나?

 

전례 없는 예금주 과세 방안이 등장한 이유는 무엇일까? 구제금융 필요 금액을 전부 지원할 경우 이미 GDP 대비 87%에 이른 국가부채가 160%까지 치솟게 될 것인데, 산업 기반이 취약한 키프로스로서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을 것이라는 게 표면적인 이유였다. 100억 유로만 지원해도 국가부채가 130%까지 올라가는데, 이것이 최대한도라는 것이다.

 

조세회피국 키프로스에 200~450억 유로 예금을 묻어둔 것으로 추정되는 러시아의 신흥재벌과 마피아들에게 금융부실의 책임을 물어야 한다는 논리, 생산적인 경제활동 없이 높은 소비 수준을 누려온 키프로스 국민들에게 책임을 물어야 한다는 논리도 등장했다.

 

특히 유럽연합의 키프로스 구제금융 과정을 주도한 독일 총리 메르켈은 “키프로스의 기존 금융 사업은 끝났다”고 단언했다. 이는 키프로스의 ‘검은 자금’ 금융관행을 겨냥한 것이지만, 이참에 키프로스와 러시아의 관계를 파탄내겠다는 의도도 포함돼 있다. 키프로스를 둘러싸고 유럽연합·미국과 러시아 사이에 지정학적 이해관계가 충돌하고 있기 때문이다.

 

러시아는 동지중해 교두보로 시리아에 해군기지를 갖고 있는데, 서방 제국주의 지원 아래 시리아 정권이 무너질 위기에 처하자, 키프로스에 새로 해군기지를 얻으려고 시도해 왔다. 더욱 중요하게는 2011년 말 키프로스와 터키 연안 해저에서 막대한 양의 천연가스가 발견되면서 그 채굴권을 확보하려는 암투가 미국·유럽연합 기업들과 러시아 기업들 사이에서 치열하게 벌어져 왔다.

 

 

‘키프로스 선례’가 갖는 의미

 

유로존 재무장관 협의체인 ‘유로그룹’의 의장 데이셀블룸은 “키프로스 구제금융 방식은 경제위기에 처한 다른 국가들을 다루는 데 모델이 될 수 있다”고 말해 파장을 일으켰다. 논란이 커지자 “키프로스는 특수한 사례”라고 말을 바꿨지만, 키프로스 구제금융 방식이 향후 하나의 선례로 작용할 것이라는 점은 분명해 보인다.

 

‘키프로스 선례’가 갖는 특징은 이렇게 요약해 볼 수 있다. 먼저 경제위기 해법을 도출하는 과정이 국가 간의 지정학적 갈등과 강하게 얽혀들었다는 점이다. 경제위기 극복을 위해 전 세계 자본가계급의 ‘단결’을 앞세우던 몇 년 전의 분위기와는 완연히 달라진 것이다. 이는 앞으로 경제위기에 대처하는 과정에서 국가 간 갈등과 대결이 크게 심해질 것임을 말해 준다. 동아시아 영토분쟁이 격해지고 환율 전쟁이 심각해지는 양상에서도 확인되던 바다.

 

또 하나는 ‘예금주 보호’라는 금기사항을 건드릴 정도로 유럽과 세계의 경제위기가 깊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당장 자본가들 사이에서도 “키프로스에서 러시아인들의 예금이 몰수당할 수 있다면, 장차 유럽의 어느 나라에서 미국인들의 예금이 몰수당하지 않으리란 법이 있는가?”라는 볼멘소리가 터져 나오고 있다.

 

‘예금주 보호’라는 원칙이 무너진 것은 향후 다른 나라의 경제위기 전개 과정에서 걸핏하면 뱅크런[대량 예금인출 사태]을 유발함으로써 불안정을 매우 심화시킬 것이다. 재앙적 혼란으로 이어질 게 뻔히 내다보이는데도 ‘예금주 보호’라는 마지노선을 포기하지 않을 수 없을 정도로 유럽과 세계의 경제위기가 심각하다는 사실을 키프로스 사태는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김호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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