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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7년 모스크바 금속공장 이야기 1

노동자가 어떻게 현장권력을 장악해 갔는가

 

 

 


아래 기사는 케빈 머피(메사추세츠 대학 역사학 교수)의 <혁명과 반혁명 : 모스크바 금속 공장에서의 계급투쟁> 글을 발췌한 것이다. ‘모스크바금속’이라는 한 금속 대공장에서 벌어진 사건들을 통해 1917년 2월부터 9월까지를 추적해 본다.

2회로 나누어 이번에는 2월부터 6월까지를 다루고, 다음에 볼셰비키가 세력을 확대해 가는 과정을 다루겠다. 


 

축제 같은 혁명

 

모스크바의 혁명 물결은 ‘피의 일요일’[1905년 1월 9일, 러시아 군주 짜르의 친위대가 평화롭게 시위하던 군중을 대량학살한 사건] 12주년을 기리기 위해 볼셰비키의 아성이던 디나모 공장 노동자들을 포함해 3만1천 명의 노동자가 파업에 나서며 시작됐다. ‘모스크바금속’에서는 272명의 노동자만 이 파업에 참여했다.

 

페트로그라드를 강타한 2월 혁명으로 짜르 체제가 빠르게 몰락했다. 페트로그라드 봉기는 모스크바 도처에서 자연발생적인 파업을 일으켰다. 2월 28일에는 ‘모스크바금속’ 노동자 3천5백 명은 점심을 먹고 공장을 나섰다. 비밀경찰 오흐라나의 보고에 따르면 “질서는 이미 무너졌다.” 한 노동자가 소식을 전했다. “내가 흥분한 채로 부서마다 돌아다니면서 외쳤다. ‘짜르는 물러나라’, 그러자 그들은 내게 물었다. ‘당신 미쳤어?’ 나는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를 다 설명해주었다.” 급하게 조직된 회의가 끝나고, “마치 산사태처럼, 모두 정문을 나서 시청으로 향했다.” 축제 같은 분위기는 심지어 경영진들에게도 전해졌다. 그들은 노동자들의 행동을 막을 어떤 시도도 해보지 못했다.

 

공장을 나선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야우자 강을 건너는 다리 위에서 노동자들은 경찰에 맞닥뜨렸다. 노동자들이 다리를 건너 시청으로 가려 하자 경찰들이 가로막은 뒤 노동자 일라리온 아스타호프를 쐈다. 모스크바에서는 이것이 혁명의 첫 폭력 사태였다. 그러자 다른 노동자들이 그 경찰대 대장과 그 부관들을 야우자 강에 던져버렸다. 자신들에게 더 이상 힘이 없다는 것을 목격한 경찰들은 모두 뿔뿔이 달아나 버렸다. 이후 새롭게 만들어진 공장위원회는 첫 번째 조치 중 하나로 이날 사망한 아스타호프의 부모에게 성금을 보내기로 했다.

 

2월 혁명으로 이중권력 체제가 만들어졌다. 부르주아와 지주들의 정당이 임시정부를 이끌었다. 노동자와 병사들은 러시아 전역에 걸쳐 즉각 1905년 혁명 때 등장했던 대중 권력 기관을 재조직했다. 그것이 바로 소비에트였다. 1917년 내내 고위층의 부, 재산, 특권과 무산자인 노동자, 병사, 농민들의 열망을 서로 화해시키려는 시도를 [개량주의자들이] 하면 할수록 임시정부와 소비에트 사이의 긴장은 더 확연해졌다.

 

대중의 민주주의는 모스크바에서 노동자들이 공장문을 닫고, 스스로 신문과 혁명 문학에 몰두하고, 정치 토론과 대중 집회들에 참여하고, 자신들의 대표들을 선출하는 과정에서 그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모스크바금속’은 다른 공장들처럼, 2월 혁명의 이 축제 같은 나날 동안 공장을 가동하지 않았다. 노동자들은 타간스카야 광장에서 열리는 집회에 참여해 16개 정당에서 나온 연사들이 혁명과 전쟁을 주제로 발언하는 것을 들었다.

 

 

 

6면 모스크바 수기.jpg

1917년 러시아 혁명 당시 모스크바

 

 

 

공장위원회

 

또한 노동자들은 즉시 1905년의 유산인 공장위원회와 소비에트를 다시 창설해냈다. 3월 4일, 마침내 노동자들이 공장으로 돌아왔을 때, 그들이 첫째로 해야 했던 일은 공장위원회 선거를 하는 것이었다. 4~500에 이르는 노동자들이 공장위원회 선거를 하려고 급히 모였다. 공장위원회 의장을 맡은 사회혁명당원 아라포프에 따르면, 노동자들은 “각 부서마다 후보자들의 이름을 외쳤다.” 노동자들의 민주주의는 흠잡을 곳이 없었다.

 

몇 년 동안의 정치적 경험을 거치며 공장 안에서 짜르 체제에 대한 유일한 대안이 되었던 사회주의자들의 대다수가 선출직에 올라갔다. 사회혁명당은 전쟁에 찬성하는 애국주의 입장 때문에 정치 파업을 삼가 비밀경찰 오흐라나의 탄압을 덜 받았다. 그래서 그들은 좀 더 유리한 위치에서 활동할 수 있었다. 아라포프는 사회혁명당원들을 “가장 활동적인 동지들”이라고 했다. 다른 이들의 회고록에서도 공장위원회 사람들은 “모두 사회혁명당원들이었다”고 말한다. 그리고 심지어 공장의 지도자인 볼셰비키 당원도 1917년 초기 시기가 “사회혁명당의 영향력” 속에 있었다고 묘사했다.

 

볼셰비키들은 2월 혁명 이후 공장에 3~4명 정도가 있었다고 한다. 당은 1917년 봄 동안 아주 소수의 신입 당원밖에 조직하지 못했다. 한 당원은 이렇게 회상했다. “우리 조직의 회원들은 [정치적으로] 많이 부족했는데, 그들은 매번 지역위원회에 지원을 요청해야 했다. 왜냐하면 라트비아인들뿐만 아니라 사이먼 이바노프와 다른 볼셰비키들이 서툰 웅변가들이었기 때문이다.

 

” 공장의 첫 총회에서, “볼셰비키들은 정말 왕따를 당했다.” 그들은 연설하는 동안 “내려와라! 이제 됐다!”는 함성에 당혹스러워 했다. 어느 노동자의 회상에 따르면, 초기 집회들에서 “볼셰비키들은 휘파람소리를 들어야 했고, 가끔은 연단에서 끌어내려지고 발언이 허락되지 않기도 했다. 우리 공장에서 사회혁명당의 영향력은 지배적이었다.”

 

 

노동자들의 현장 권력

 

공장 전체에 걸쳐, 정치 토론은 전쟁과 정부 권력에 관한 주제로 집중됐다. 볼셰비키의 슬로건 “전쟁을 끝장내자”는 사회혁명당과 같은 “소부르주아” 정당의 슬로건과 구별됐다. 사회혁명당은 “평화와 인민의 형제애여, 영원하라”는 슬로건을 내걸었다. 모스크바 소비에트에 보내는 편지에서 공장 노동자들의 대표는 “혁명 군대는 혁명의 방어를 위해 예비 병력으로 남아야 하며, 전방에 가장 먼저 보내야 할 사람들은 경찰들과 헌병대”라고 주장했다.

 

노동자들은 직접 행동으로 즉각 현장의 고충들을 처리해 나갔다. 노동자들은 3월 초 공장에 돌아오자마자 즉시 8시간 노동제를 적용시켰다. 3월 21일 모스크바 소비에트는 8시간 노동제 결의문을 통과시켰다. 8시간 노동제는 도시 전역의 많은 공장 노동자들이 이미 직접 행동을 통해 실현시킨 것이었다. 사측은 3월 23일에 다음과 같은 선언문을 발표했다.

 

“이런 노동시간 단축은 전쟁의 영광스런 결과를 만들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하는 전체 국민의 의무에 반하는 것이다. 나라를 지키는 우리 군대를 지원하는 것이 우리 의무다.” 그러나 노동자들의 압력 때문에 사측은 8시간 노동제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노동자들은 또 야간교대 근무시간을 7시간으로 바꾸고, 교대를 언제 시작하고 끝낼지를 자신들이 알아서 결정했다.

 

노동자들은 사측 관리자를 정하고 해임할 수 있는 권한도 자신들에게 있다고 결정했다. 사측은 5월 23일, “주조부에 있는 노동자들이 부서장 매티스를 관리자로 두기 싫다며 즉시 그를 직위에서 해제시켰다”며 불만을 토로했다. 그 다음날, 다른 부서의 노동자들이 자기 관리자를 또 해고시켰다. 한 노동자의 설명에 따르면, 그 관리자는 그 부서의 여성노동자들에게 특히나 폭력적이었다고 했다. 임신한 여성을 해고하고, 생산직 여성노동자에게 바닥 물청소를 하도록 강요했다고 한다.

 

임금 문제, 관리자를 끌어내리는 문제를 둘러싸고 타협의 여지는 없어 보였다. 공장에서도, 소비에트에서도, 중재는 모두 실패했다. 사측은 임시정부에 호소했다. 하지만 계급이 뚜렷하게 대립함에 따라 더욱 큰 모순을 겪을 수밖에 없었던 임시정부는, 자본과 노동의 이해관계 사이에서 다리를 벌리고 버티기가 더 힘들어졌다. 경영진의 회유도, 압박도, 전투적인 노동자들의 물결을 막을 능력은 없어 보였다. 대치는 점점 더 선명해져 갔다.

 

 

요구의 다양성과 명확성

 

6월 19일, 공장 위원회는 다른 주제들에 대해서도 요구안을 제출한다.

 

노동자들의 위원회와 공장 총회, 강연, 기타 문화교육적인 활동들을 위한 영구적인 공간을 마련할 것.

 

1. 야간 근무는 7시간으로 하나, 임금은 정상적으로 8시간치를 지급할 것. …

4. 모든 폐쇄된 작업 공간엔 환풍기를 설치할 것

5. 남녀용 욕실과 사우나를 모두 마련할 것 …

12. 출산한 여성에게는 출산 전 2주부터 출산 후 4주까지 휴가를 주고, 평균임금에 기초해 완전한 임금을 지급할 것.

 

 

요구의 다양성, 명확성, 힘은 상승하고 있는 노동자들의 자신감과 조직력을 나타낸다. 회의공간을 마련하라는 요구는 노동자들의 1순위가 ‘자신들의 조직 강화’라는 것을 보여준다. 또한 여성의 이익을 담은 부분은 노동자들의 요구가 보다 더 포괄적으로 확대되고 있다는 것을 나타냈다.

 

사측은 임금의 계층화를 내세웠다. 미숙련 노동자들의 임금을 올리면 생산성의 기반이 무너질 것이라고 주장했다. “임금 수준은 근로자의 생산성에 직접 연동시켜야 한다. 생산성을 기준으로 해서, 생산성이 높을수록 성과급을 받는 식으로, 근로자들에게 도움이 되는 부서별 임금을 적용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노동자들은 회사의 이윤을 늘리는 것보다 경제적 평등에 관심이 더 있었다. 사측은 “공장위원회에서 노동자들의 요구가 거의 다 충족되고 나자, 사흘 정도는 노동자들의 생산성이 높아졌다. 그러나 생산은 이후 정상치보다 50~60%나 떨어졌다”며 불만을 제기했다. 노동자들은 최저임금의 1.5배 인상을 요구했다. 하지만 사측은 그 정도의 인상은 매월 6만 내지 7만 루블의 손실을 초래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공장폐쇄에 맞서다

 

6월 20일, 사측은 공장위원회에 곧 공장문을 닫겠다고 알렸다. 경영진은 정부에 재정적 위기 상황을 해결할 수 있도록 지원해달라고 요청했다. 만일 정부가 즉각적인 조치를 취하지 않으면 경영진은 “7월 1일부로 공장을 폐쇄하겠다”고 했다. 노동자들은 공장 폐쇄를 그냥 받아들이지 않았다.

 

6월 28일, 공장위원회는 사측의 공장 폐쇄 시도에 맞서 대치하고 있다고 모스크바 소비에트에 보고했다. 관리자는 전력공급을 중단하라고 지시했으나, 공장위원회는 충분한 원자재와 연료가 있는 것을 발견하고 작업을 계속하라고 지시했다. 노동자들의 대표는 공장에 전력 공급이 끊기지 않게 해달라고 소비에트에 요청했다.

 

결과적으로 사측의 공장 폐쇄 시도는 무산됐다. 공장의 운명을 결정하는 임시정부 회의에서, 공장위원회 대표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회사는 전쟁으로 많은 이윤을 벌어갔고 공장 인력을 계속 늘려왔는데, 공장 노동자들의 임금은 급격히 하락시켜왔다.” 통상부 장관 스테파노프는 “해당 공장은 모스크바 지역 금속 산업에서 예외적으로 상당한 중요성을 가지는 곳”이라며 폐쇄에 반대한다고 했다.

 

여기서 알 수 있듯, 임시정부가 ‘모스크바 금속’ 공장 폐쇄를 반대한 건 노동자들의 전투적 요구에 호응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방위산업체로서 전쟁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는 이 공장의 군사적 가치를 고려했기 때문이다.

 

번역 현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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