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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가에 대한 어떠한 환상도 유해하다는 진실을 알려준

칠레 노동자들의 뼈아픈 경험

 

오연홍 노동자운동 연구공동체 뿌리

 

 

 

5면 칠레.jpg

아옌데 정부가 낡은 지배계급의 국가에 매달리면 매달릴수록, 지배계급은 가장 반동적인 방식으로 이 ‘사회주의 정부’를 박살낼 수 있다는 확신을 키워갔다. 그들의 확신은 실행에 옮겨졌다. 자본주의 국가에 대한 환상이 비극을 낳았다. 사진은 대통령궁을 포위하고 있는 쿠데타군.

 

 

 


지난 정부는 광범한 대중 속에서 ‘국가란 무엇인가?’라는 강렬한 의문을 불러일으켰다. 사람들은 답을 찾기 위해 거리로 나와 싸웠다. 투쟁의 열매를 낚아채 권력을 쥔 문재인 정부는 비정규직의 정규직화나 노동시간 단축 같은 사안에 그럴싸한 모습을 보이면서 국가에 대한 환상을 열심히 부추기고 있다.

 

국가란 지배계급의 공동위원회에 불과하다는 마르크스의 직설적인 주장은 낡은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자본주의 국가에 대한 환상은 결코 좋은 결과를 안겨 주지 못한다. 1970년 11월 3일 출범해 1973년 9월 11일 군부쿠데타로 막을 내린 칠레 아옌데 정부의 비극적인 사례가 이를 잘 보여준다.


 

 

선거로 선출된 사회주의 정부

 

칠레사회당 출신의 사회주의자 아옌데는 1917년 러시아혁명 사례와는 달리, 선거를 거쳐 집권했다. 1969년에 노동자정당인 사회당, 공산당과 중간계급정당인 급진당, 사회민주당, 인민통일행동운동, 인민독립행동 등 6개 정당이 ‘민중연합’을 결성했는데, 경제위기와 빈부격차에 질린 가난한 노동자와 농민들의 열망이 이 민중연합에 대한 지지로 모여들면서 아옌데의 집권이 성공할 수 있었다.

 

대중의 열망이 강렬했던 만큼 아옌데 정부는 급진적인 개혁정책을 추진했다. 연금 확대, 의료비 감면, 어린이를 위한 분유 무료배급, 빈민가 주택개선, 임금인상, 국유화와 토지개혁 등이 잇따랐다. 당연히 자본가들은 이런 조치들에 증오심을 품었고, 반격에 나섰다.

 

우리에게 잘 알려진 다국적기업 네슬레도 그 일부다. 아옌데 정부가 아동 영양실조와 유아사망률을 완화하기 위해 15세 이하 모든 어린이에게 하루 0.5리터의 분유를 무상배급하기로 했다. 아옌데 정부는 네슬레에 제값을 주고 분유를 구입하려 했지만 거절당했다. 자본가로서 단기적으론 돈을 받고 분유를 팔면 그만이겠지만, 자유로운 시장경쟁과 이윤추구라는 ‘질서’를 조금이라도 ‘교란’시키는 아옌데 정부의 정책을 근본적으로 용납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말다툼할 생각이 없었던 자본가들

 

아옌데 정부는 선거와 의회절차를 중시하며 개량적인 방식으로 문제를 해결해 나가려 했다. 하지만 자본가들은 사태를 결정하는 건 말다툼이 아니라 힘이라는 간명한 진실에 충실했다. 그들은 자본파업을 일으켰다. 운수업자들은 운송을 중단했다. 제조업자들은 공장을 폐쇄했다. 판매업자들은 상품을 빼돌렸다. 경제혼란을 일으켜 정부를 궁지로 몰아넣기 위한 것이었다.

 

사회의 변화를 저지하려는 자본가들의 저항에 대해 아옌데 정부는 어떻게 대응했을까? 아옌데는 주춤거렸다. 그는 노동자들이 밑으로부터 분출하는 단결과 투쟁의 힘에 의존하기보다는, 기존 지배계급과 협상하고 동의를 구하는 방식으로 자신의 정책을 설득하려 했다.

 

자본가들이 더 거칠게 나오는 걸 막아야 한다는 생각에 사로잡힌 아옌데 정부는 급격한 개혁을 자제하기로 하고, 더 나아가 노동자들의 시위도 자제시켰다. 지배자들과 타협할 태세가 돼 있다는 걸 보여주기 위해 반동적인 장군들을 장관으로 임명하고, 얼마 후 쿠데타 수괴가 될 피노셰를 육군참모총장으로 임명했다. 이런 태도는 아옌데에게 정권을 빼앗긴 기존 지배계급의 자신감을 더욱 살려줬다.

 

 

역시 말다툼할 생각이 없었던 노동자들

 

가난한 노동자와 농민들은 아옌데 정부가 얼마나 개혁정책을 잘 추진하는지 구경만 하고 있지 않았다. 노동자들은 자본파업을 일으킨 공장을 점거하고 ‘산업코르돈(조정위원회)’이라고 불린 일종의 평의회조직을 건설했다. 자본가들이 문을 닫은 300개 이상의 공장을 노동자들이 장악해 가동했다.

 

산업코르돈은 조합원인가 아닌가, 대공장인가 중소공장인가, 어떤 직종인가 따위로 노동자를 구분하지 않았다. 협소한 조합적 이익을 넘어 사회 전체를 어떻게 뜯어고칠 것인가라는 정치적 과제에 노동자들이 착수하게 된 것이다. 빈농들도 대농장을 점거하고 스스로 통제하기 시작했다. 자본가들의 보이콧에 맞서 물자공급위원회가 만들어졌다. 칠레에서도 위기에 맞서 혁명적 행동에 나서는 노동대중의 강력한 잠재력이 살아 움직였다.

 

불행한 것은 사회주의를 표방한 아옌데 정부가 이처럼 아래로부터 자주적 행동에 나선 노동자와 빈농들의 혁명적 시도에 시큰둥한 태도를 취했다는 점이다. 아옌데 정부는 거듭 반동세력과 타협하며 설득하려고 매달렸다. 그럴수록 반동세력은 자신만만해졌다. 아옌데가 선거를 통해 대통령에 당선되긴 했지만 군대, 경찰, 법원, 감옥 등 관료적 억압적 국가기구는 여전히 자본가계급의 손아귀에서, 자본가계급을 위해 작동하고 있었다.

 

 

환상은 비극을 낳는다

 

자본가계급의 국가를 내버려둔 채, 그것과 공존하면서 사회의 급진적인 변화를 이루려 했던 아옌데의 환상은 냉혹한 심판을 받게 된다.

 

아옌데는 노동대중의 자주적인 조직과 투쟁을 등한시했지만, 지배계급은 자본가체제를 뒤엎을 수 있는 진정한 힘이 어디에 감춰져 있는지 잘 알고 있었다. 1973년 쿠데타를 일으킨 군부세력은 노동자와 빈농들의 자주적인 투쟁조직을 파괴하기 위해 병력을 움직였다. 아옌데 정부가 그토록 설득하려고 애썼던 자본주의 국가기구 전체가 이 정부를 무너뜨리기 위해 달려들었다.

 

군부세력은 아옌데 정부를 무너뜨리기 위해 그가 머물던 모네다궁으로 폭격기와 탱크를 보냈다. 미국 지배계급의 후원을 받으며 쿠데타를 지휘한 피노셰는 아옌데에게 굴욕적인 망명을 권유했다. 아옌데는 거부했다. 최후의 정치적 양심을 지키기 위해 그는 자기 생명을 바쳐야 했다.

 

하지만 희생은 그의 죽음으로 끝나지 않았다. 군부쿠데타에 맞서는 과정에서 수많은 혁명적 노동자들이 목숨을 잃었다. 그뿐만 아니라 오랜 군사독재 기간에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사람이 모진 탄압에 생명을 잃었고, ‘실종’됐다.

 

 

국가 : 건너뛸 수 없는 문제

 

칠레 아옌데 정부의 붕괴는 비극적인 사건이다. 중요한 건 그 비극의 근원을 이해하는 것이다. 칠레 노동자와 빈농들의 혁명적 잠재력은 충분했고, 아옌데 자신의 신념도 진지한 것이었다.

 

하지만 아옌데 정부는 기존의 반동적, 관료적인 자본주의 국가기구들을 그대로 둔 채, 반동세력과 타협하면서, 그들을 말로 설득할 수 있으리라고 믿었다. 반대로 산업코르돈 같은 아래로부터의 정치적, 대중적인 투쟁기구를 미래의 혁명적인 노동자권력으로 성장시키기를 꺼려했다. 자본주의가 허락하는 선거와 의회 절차를 넘어서기를, 자본주의 국가와 단절하기를 두려워한 것이다.

 

아옌데 정부가 낡은 지배계급의 국가에 매달리면 매달릴수록, 지배계급은 가장 반동적인 방식으로 이 ‘사회주의 정부’를 박살낼 수 있다는 확신을 키워갔다. 그들의 확신은 실행에 옮겨졌다. 자본주의 국가에 대한 환상이 비극을 낳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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