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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년 7‧8‧9 노동자대투쟁

(4) 노동자계급은 전국적 세력 : 인천‧경기‧서울로, 운수와 광산업으로 확산되는 대투쟁

 

이용덕

 

<이 글은 주로 『7~8월 노동자대투쟁(민중사)』, 『87노동자대투쟁(풀빛)』, 『새벽을 여는 함성(도서출판 현장)』 등을 참고해 작성했다.>

 

 

8면 87년.jpg

 

 

1 인천을 휩쓴 투쟁의 물결

 

8월 4일 대우중공업 창원공장 노동자들의 파업에 고무된 인천 대우중공업 1,500여 노동자들이 8월 6일 파업에 돌입했다. 대우중공업 파업은 인천의 대우그룹 계열사 투쟁을 확산시키는 촉매제였다.

 

대우중공업 파업을 시작으로 투쟁은 삼익악기, 코리아스파이스, 태연물산, 한국종합기계, 로얄 토토, 후지카 대원전기, 풍산금속, 인천조선, 대원운반기계 등으로 급격히 확산되었다. 이때부터 노동자투쟁은 인천지역 전체를 휩쓸었다. 어떠한 어려움이 있더라도 단결을 포기하지 않으려는 의지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부평4공단에 있었던 코스모스전자 노동조합의 경우 사측이 조합원 3명을 ‘수습사원’이라는 이유로 해고시켰지만 전체 조합원이 똘똘 뭉쳐 해고를 무효화시켰다.

 

노동자들은 강력한 지역 연대로 부평, 인천교 지역, 부천 등 도시의 주요 공단을 마비시켰다. 삼익악기, 영창악기, 경동산업, 경원기계 등이 지역연대의 구심이었다. 연대투쟁에 참여하는 노동자들이 늘어나고 자신감이 커지면서 투쟁은 더욱 더 적극적인 형태를 띠었다. 파업농성에서 가두시위로 발전했고 투쟁 내용도 단순한 노동조건 개선투쟁을 넘어 어용노조 민주화, 해고자 복직 요구를 포함시켰다.

 

예를 들어 삼익악기 노동자와 코리아스파이서, 동양엘리베이터 노동자들은 가두시위를 전개했다. 영창악기 노동자 2천여 명은 인근 경동산업 노동자들과 함께 인천교와 유신교를 완전히 장악하는 과감한 가두시위를 펼쳤다. 대우조선 이석규 열사의 죽음이 알려지자 분향소를 설치했고, 8월 26일 오후에는 회사 앞 경인국도를 점거해 1시간 이상 경찰과 격렬한 투쟁을 전개했다.

 

 

2 언론은 자본가의 앵무새

 

8월 21일 한국일보, 조선일보 등은 ‘괴청년 백여 명, 노조 가입하라며 근로자 폭행’이라는 기사를 일제히 보도했다. 그러나 사실은 전혀 달랐다. 8월 20일 새벽, 인천 한세실업 여성노동자들을 향해 구사대 백여 명이 온갖 욕설과 폭언을 퍼붓자, 인근 주택가에 사는 주민들과 지역 노동자들이 보다 못해 구사대에 항의하다 충돌이 생겨 양쪽에 부상자가 발생한 것이다. 언론은 구사대를 지휘하던 생산과장의 말을 일방적으로 인용해 주민들과 지역 노동자들을 ‘괴청년’이라 불렀고 이들이 여성노동자들을 폭행한 것인 양 왜곡했다. 노동자들은 경위서를 발표하고 왜곡보도에 항의했다.

 

KBS, MBC도 대우조선 이석규 열사를 광주 망월동 묘지에 묻겠다는 노조의 발표를 “노조가 시신을 가족들로부터 빼앗아 억지로 망월동에 묻으려 한다”고 왜곡했다. 사실은 가족이 노조에 제의한 것인데 현직 군장교인 삼촌의 말만 일방적으로 인용하면서 사실을 날조했다.

 

자본가언론은 노동자대투쟁 기간 내내 ‘불순세력의 개입’, ‘노사분규의 정치적 이용’ 운운하며 자본가의 앵무새 역할을 했다. 경찰과 구사대의 폭력은 전혀 보도하지 않았다.

 

 

3 연대 가두시위와 공단순회투쟁

 

성남지역에서도 대투쟁의 바람을 타고 노동자들이 들고 일어났다. 에이스침대와 리오 노동자들은 매일 “임금인상 쟁취하여 인간답게 살아보자”, “노예노동 철폐하고 인간답게 살아보자”고 외치며 다른 회사 노동자들과 연대 가두시위를 전개했다.

 

8월 18일 오후 공단 파출소 앞에서 평화시위 도중 전경과 대치하자, 노동자들은 자신의 몸과 전경의 발에 신나를 붓고 결연히 투쟁해 물리쳤다. 21일엔 구사대의 칼에 찔려 3명의 노동자가 입원하자 지게차를 몰고 파출소로 진출했다. 연행자가 발생했는데 물러서지 않고 시위를 벌여 연행 노동자를 석방시켰다. 그리고 이 여세를 몰아 민주노조를 결성했다.

 

오리엔트 성남공장 노동자들은 통근차를 몰고 성수공장에 가서 노동자 300여 명을 태워와 성남공장 농성에 동참시키면서 연대의 힘을 키웠다. 에이스와 리오 노동자들은 13일 투쟁하는 동안 매일 아침 출근 시간에 대열을 맞춰 공단을 돌며 출정식을 거행해 출근하는 공단 노동자들의 뜨거운 지지를 받았다.

 

 

4 지역을 뛰어넘은 연대투쟁

 

투쟁의 불꽃은 안양‧안산‧수원 등으로 번졌다. 특히 노동자들은 지역을 뛰어넘는 연대투쟁을 향해 첫발을 내딛었다. 대우중공업 창원, 인천, 군포, 서울 공장 노동자들이 서로 연대했다. 한일합섬 수원공장 노동자들은 마산공장 노동자들과, 금성사 평택공장 노동자들은 창원공장, 서울 구로공장 노동자들과, 태평양화학 수원공장 노동자들은 서울 대림동공장 노동자들과 연대투쟁을 벌였다.

 

87년 노동자대투쟁 때의 모든 투쟁이 승리한 것은 아니다. 대표적으로 금성전선 노동자들의 경우 지역 내에서 가장 치열하고 가장 조직적으로 싸웠지만 사측은 협상을 거부했고 경찰이 개입해 노동자를 대거 연행해가면서 무너졌다.

 

정부는 8월 10일까지는 직접 개입을 자제했다. 노동자대투쟁이 이렇게 강력하고 폭발적으로 터져 나오리라 예상하지 못했고, 6‧29선언 이후 정치적으로 열린 공간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8월 10일 이후 “불순세력 개입 차단”, “좌경용공 세력 척결”이라는 미명 아래 여론을 적극적으로 조작하고 본격적인 개입을 시작했다. 8월 27일 대검찰청은 ‘좌경사건 관련 1,618명 소재 파악 수사’ 방침을 발표한다. 파업 현장에 공권력 투입이 본격화되기 시작했다. 8월 28일 이석규 열사 추모집회‧시위 관련 933명을 연행했다.

 

 

5 노동자계급의 거대한 힘

 

서울지역은 비교적 늦게 일어났다. 하지만 정부 측의 탄압이 거세진 8월말까지도 투쟁은 끊이지 않았다. 8월 하순에도 구로 3공단 약 20여 사업장, 영등포지역 약 10여 사업장 등 총 50여 사업장에서 투쟁이 일어났다.

 

운수노동자들의 투쟁은 8월 7일 전주 택시노동자의 총파업을 시발로, 9일에는 광주 시내버스 총파업, 12일에는 전주, 군산, 김제 시내‧시외버스 총파업, 14일에는 대전의 버스‧택시 총파업이 잇달아 전라‧충청도 일대를 마비시켰다. 또 부산, 포항, 성남, 춘천, 인천과 다른 지역의 운수노동자들이 가세했다. 운수노동자들은 공공서비스라는 이유로 언론의 집중공격을 받았으나, 무임승차와 같은 다양한 투쟁 방식을 개발하기도 하고, 다른 산업 노동자들과 연대투쟁을 조직하면서 투쟁의 고삐를 늦추지 않았다.

 

광산노동자들의 투쟁도 8월에 들어서면서부터 전면화됐다. 석탄공사 함백광업소 노동자들의 투쟁을 시작으로 대성탄좌 문경광업소 노동자 1,400명이 파업에 들어갔고, 동원탄좌 사북광업소, 석탄공사 도계‧장성광업소 등 주요 탄광 노동자들이 투쟁에 합류했다. 광산노동자들의 투쟁은 철도와 국도를 여러 번 점거할 정도로 격렬했다.

 

바야흐로 전국은 노동자파업투쟁의 불길에 휩싸였다. 이제 노동자투쟁은 남부지역의 몇몇 대기업에 국한된 것이 아니었다. 그리고 중화학공업 노동자들에 국한된 것도 아니었다. 전국에 걸쳐, 전 산업에 걸쳐 어디서나 머리띠를 두르고 대열을 지어 움직이는 노동자의 모습을 찾아볼 수 있었다. 8월 17일부터 29일까지의 기간에는 전국적으로 하루 평균 150개의 공장에서 새롭게 투쟁이 일어났다. 20일에는 하루 500건, 29일에는 743건의 투쟁이 벌어졌다. 노동자계급의 거대한 힘이 전국을 장악했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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