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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년 7·8·9 대투쟁

(2) 노동자대투쟁의 시작-울산에서 불길이 솟구쳐 오르다

 

이용덕

 

 

 

 

 

7면 87년.jpg

 

 

 

 

1 드디어 현대에서도 노조가 결성되다

 

87년 7월 5일 현대엔진 노동자 101명은 울산의 한 디스코텍에 모여 노동조합 결성대회를 치렀다. 권용목은 1978년부터 동료들과 독서회를 만들었고 80년대 초에는 고적답사모임을 만들어 현장을 조직했다. 1987년 1월에 상여금 차등지급에 항의하는 몸벽보 시위에 500여 명이 참가했다. 4월에는 노사협의회를 이용해 대중적인 임금인상투쟁을 전개했다. 그러나 노사협의회만으론 한계가 있다는 걸 깨닫고 6월 항쟁의 여운이 전국을 휘감고 있던 7월 5일 민주노조를 만들었다.

 

노동자대투쟁은 노동자들의 자주적이고 자발적인 투쟁이었다. 그런데 이 투쟁이 아무런 준비나 지도 없이 일어난 것은 아니다. 권용목이 현대엔진에서 수년간 노조 결성을 준비했듯 87년 대투쟁을 주도한 다른 사업장에서도 민주노조운동을 개척하려 했던 선진노동자들의 피어린 노력이 있었다.

 

예를 들어 부산 대한조선공사(현 한진중공업)의 박창수는 86년 여름 ‘우리는 개밥을 먹을 수 없다’는 내용의 유인물을 안전모 속에 숨기고 들어가 공장에 뿌리고 ‘도시락 거부투쟁’을 주도했다. 대우조선에서도 84년부터 소모임을 준비했던 노동자들이 있었다. 이들은 87년 1월 22일 임금, 산재 문제에 대한 노동자의 권리를 주장한 ‘상고문’을 조선소 곳곳에 뿌렸다.

 

현대엔진 민주노조의 탄생은 다른 공장 노동자들에게 대단히 의미 있는 사건이었다. 핵심재벌 현대그룹이 설립한 산하 30여 개 계열기업 가운데 현대해상화재보험만 노조가 있었다. 정주영은 “내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에는 노조를 인정할 수 없다”며 악랄한 반노조 정책을 펼쳐왔다. 이렇게 얼어붙은 땅에서 민주노조의 꽃이 피는 걸 보며 노동자들은 자신감을 가질 수 있었다.

 

 

 

2 대의를 담은 강한 불꽃

 

그때 현대엔진은 7등급으로 나누어 상여급을 지급했다. 노동자들은 가슴 아파했다. “다른 사람은 300프로 받을 때 제일 적게 받는 사람은 뭐 150 프로 받는 사람도 있었거든요. (...) 그때만 해도 사람들이 의리가 있었거든요... 다른 사람이 인자 150 프로 받으면 그걸 마음 아파해주고 그랬기 때문에...”(<1987년 울산 노동자대투쟁1>, 울산대 출판부, 신찬성 구술 중에서)

 

노동자들은 상여금 차등 철폐를 강하게 요구했다. 신찬성은 임금 부분이 조금 모자라도 상여금 차등이 없어졌기 때문에 노사 합의를 할 수 있었다고 얘기했다. 이처럼 현대엔진 노동자들의 요구와 행동은 ‘노동자는 하나’라는 대의를 담고 있었다.

 

이런 대의는 현대중공업에서도 살아 숨 쉬었다. 87년 노동자대투쟁 때 현대중공업 원하청 노동자들의 17개 요구사항 중 12번째가 ‘하청노동자 정규직화’였다. 원하청 노동자들은 함께 싸웠고 만 명 이상의 하청노동자를 정규직화시켰다.

 

 

 

3 조직의 중요성

 

7월 15일 현대미포조선 노동자들이 노조 결성대회를 갖고 다음날 보고대회를 열었다. 그런데 노조 설립신고서를 시청에 접수하려는 순간 회사 측이 이를 빼앗아가 버렸다. 하지만 이것은 노동자들의 거대한 진군을 읽어내지 못한 자본가들의 실수였다. 빗발치는 비난여론을 거스를 수 없어 시청은 3일 만에 신고필증을 내줬다. 이 ‘탈취사건’을 계기로 노조 결성이 전국적인 관심사로 떠오르고, 노동자들의 자신감과 열기는 전국으로 빠르게 확산되어 갔다.

 

현대엔진과 미포조선에서 쓰라린 패배를 맛보았던 현대자본은 이번에는 어용노총 산하 금속노련과 한통속이 돼 21일과 24일 현대중공업과 현대자동차에 어용노조를 결성했다. 그러나 25일, 전날 결성된 어용노조 결성보고대회에서 현대자동차 노동자들의 분노의 함성이 터져 나왔다. ‘어용노조 물러가라’며 자발적으로 형성된 노동자 시위대열은 공장을 한 바퀴 돌면서 8,000여 명으로 늘어나 일시에 공장 전체를 마비시켰다. 이들은 폭우가 쏟아지던 상황에서도 농성을 계속하면서 임시총회를 열어 새로운 민주노조 집행부를 세워 자본으로부터 ‘민주노조를 인정한다’는 각서를 받아냈다. 현대자동차의 승리에 힘입어 현대중공업에서도 25일 서명운동을 시작으로, 28일에는 1,500여 노동자가 어용노조 퇴진과 임금인상을 요구하며 파업했다.

 

현대그룹 노동자들의 요구는 비슷했다. 임금 인상, 차별적인 임금 체계 철폐, 머리 길이 통제 등 군대식 노무 관리 철폐 요구가 모든 파업에서 나타났다. 경제적 요구가 많았고 요구 수준도 아직 개별 사업장 차원에 머무르고 있었다. 그런데 주목해야 할 점은 어용노조 해체, 민주노조 쟁취가 중심 요구로 부각되었다는 사실이다. 다른 수많은 사업장에서도 노동자들은 조직의 필요성, 즉 민주노조의 필요성을 인식하고 어용노조를 퇴진시키기 위해 싸웠다.

 

 

 

4 노동자의 힘이 법

 

이제 불길은 울산 현대 계열사 전체로, 울산 전체로 번져갔다. 26일 현대중전기노조 건설, 27일 태광산업과 동양나일론(지금의 효성) 노동자들의 파업, 풍산금속 파업, 30일 현대중공업, 현대중전기 노동자들의 연합 가두시위, 31일 이후 6개 버스업체 파업, 8월 1일 현대정공, 현대종합목재 노조 건설, 8월 초 석유화학단지와 온산공단으로 파업 농성 확산···.

 

현대계열사 가운데 가장 열악한 노동조건에 허덕이던 현대정공(지금의 현대자동차 5공장) 노동자들의 투쟁은 가장 폭발적으로 진행됐다. 1,200여 현대정공 노동자들은 붉은 페인트로 ‘민주노조 결성’이라고 쓴 회사버스를 타고 시가지를 누볐고, 사무실의 유리창을 박살내고는 가두시위에 나섰다. 또 출동한 전투경찰에 위축되기는커녕 간선도로를 4개의 컨테이너로 차단하고 열기를 더욱 높였다.

 

87년 노동자대투쟁 때의 파업은 모두 불법파업이었고 불법투쟁이었다. “노동위원회가 적법성을 심사한 뒤 일반사업장은 30일, 공익사업장은 40일이 지나야 파업할 수 있다”는 규정을 완전히 무시했기 때문이다. 노동자들은 먼저 파업, 농성, 거리시위를 시작했다. 선투쟁 후교섭이었다. '악법은 어겨서 깨뜨린다'는 노동자투쟁의 원칙이 살아 있었기에 대투쟁은 가능했다.

 

 

 

5 권용목의 변절을 어떻게 볼 것인가?

 

권용목은 87년 노동자대투쟁의 상징적 인물이다. 그는 현대엔진 노조를 준비했고 29살에 노조위원장이 된다. 8월 8일 결성된 현대그룹노조협의회(현노협)도 이끌었다. 노동자들에게 아주 신망이 높았고 뛰어난 선동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몇 번의 구속과 수배를 거친 후 1995년 출범한 민주노총의 초대 사무총장도 맡았다. 그런데 그 이후 그는 민주당 이인제 캠프, 정몽준의 국민통합 21을 전전하다 결국에는 ‘뉴라이트 신노동연합’을 만들고 극우의 관점에서 민주노조운동과 대결하다가 생을 마감한다.

 

최근에 87년 노동자대투쟁의 또 다른 주역이었던 문성현, 백순환이 문재인 품으로 기어들어갔는데 권용목은 변절의 선배라고 볼 수 있다. 권용목은 왜 변절했는가?

 

권용목의 인터뷰 한 대목을 살펴보자. 그는 이렇게 얘기했다.

 

“우리 사회에서 가장 문제되는 것이 좋은 투자처를 찾기 힘들다는 것입니다. 자연히 돈이 투기적인 곳으로 흘러 들어갑니다. 한마디로 생산적인 곳에 투자하자니 겁이 나는 것입니다. 노동자가 앞장서서 생산성을 높이고, 기업을 사랑하고 경쟁력을 갖추는 길을 찾아간다면 투기성 자본이 앞다투어 생산적 투자로 전환되어 갈 것입니다.” (전투적 노동운동의 상징 권용목-나는 이래서 노동운동 현장을 떠났다, 월간조선 2006년 9월호에서)

 

그는 한국 자본주의의 호황이 끝나가고 있음을 느꼈다. 그런데 자본주의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대안은 없다고 생각했다. 그는 자본주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노동자가 협조하고 희생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권용목의 변절은 전투적이지만 자본주의 자체에 도전하지 않는 노조 간부가 결국 어떻게 자본가계급의 하수인이 될 수 있는지를 잘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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