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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 있는 곳이 달라지면 풍경도 달라진다”

노동자에게 주인‘의식’만 불어넣고 들러리로 동원하는 노동이사제

 

오연홍 노동자운동 연구공동체 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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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원순 서울시장이 꿈꾸고 문재인 정부가 확산하려는 ‘노사협력’이란 곧 노동자가 자본가체제의 부속품으로 얌전하게 끼워 맞춰지는 그림을 뜻한다. (사진_연합뉴스)

 

 

 

노동이사제(근로자이사제)

지난해 말부터 서울시에서 국내 최초로 노동이사제를 도입 운영하기 시작했다. 이는 <노동자세상> 161호에서 다룬 ‘서울모델’의 중요한 구성요소다. 정원 100명 이상의 서울시 투자, 출연기관에 노동이사를 의무적으로 도입하도록 하는 조례가 2016년 9월 제정됐다. 이 조례를 따라야 하는 기관은 서울교통공사(전 서울메트로와 서울도시철도공사), 서울주택도시공사, 120다산콜재단 등 16개 기관이다. 노동자대표 1~2명이 이사회에 참여해 의결권을 행사하게 된다. 얼핏 보면 노동자가 일터의 주인이라도 된 것처럼 여겨진다.

 

 

“노동자와 기업은 가장 긴밀한 파트너가 돼야 하니까요.” 박원순 시장의 말이다. 서울시가 노동이사제 도입을 추진하면서 밝힌 바에 따르면, “근로자와 경영자는 소통을 통해 책임과 권한을 함께하는 공동운명체”이며, “근로자이사제 도입으로 근로자의 주인의식을 강화”하겠다고 한다.

 

박원순 시장은 이 제도의 의미를 설명하며 “노동자를 기업의 주인으로 초청하는 것”이라고 역설했다. 그렇게 해야 “노사갈등에 따른 사회경제적 손실을 예방할 수 있다”는 주장이다.

 

 

들러리

 

어차피 노동이사는 1~2명에 불과하다. 이들이 10여 명 되는 이사회 구성원들 사이에 자리를 잡고 앉아 있을 수는 있다. 사람들은 보통 이런 경우를 보고 ‘들러리 선다’고 말한다.

게다가 이른바 노동이사가 반드시 현장노동자들의 권리를 올바르게 대변하는 사람으로 임명되리라는 보장도 없다. 노동이사로 임명되면 자동으로 노동조합에서도 탈퇴해야 한다. 자연스럽게 노동이사는 최고 경영기구인 이사회의 일원으로서 자기 정체성을 우선시할 가능성, 노동조합의 규율로부터 동떨어질 위험이 커진다.

 

한때 서울지하철노조 위원장이었으나 그 뒤 서울도시철도공사 기술본부장, 상임이사 등으로 신분이 달라진 석치순은 이렇게 말했다.

“경영진 자리에 와서 기업 경영상태를 직접 살펴보니, 노조 위원장 시절에 회사를 상대로 요구했던 사항들을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됐다.” “노동조합도 방관자적 자세에서 벗어나야 한다.” “권리가 주어지는 대신 책임이 따른다는 것을 인식해야 한다.”

 

 

주인‘의식’

 

박원순 시장의 희망대로 주인‘의식’을 갖게 된 모양이다. “서 있는 곳이 달라지면 풍경도 달라진다”는 문구가 바로 떠오른다. 물론 진짜 주인이 되는 건 아니다. 실질적인 결정권이 없는 들러리일 뿐이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이런 들러리는 상당히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노동자투쟁을 이끌었던 인물을 앞세워 노동자들에게 책임을 떠넘기는 효과적인 중간고리가 되기 때문이다.

 

서울시는 독일 폴크스바겐의 아우토 5000 프로그램을 모범 사례처럼 제시한다(이른바 광주형 일자리 모델도 이런 사례에 주목한다). 경제위기 상황에서 공장을 해외로 이전하는 대신, 국내에 회사를 차려 5,000마르크를 받는 노동자 5,000명을 채용하겠다는 계획이었다.

 

5,000마르크는 기존 폴크스바겐 임금에서 20% 삭감한 수준이었다. 전형적인 양보교섭, 즉 노동자의 살을 깎아 자본의 위기를 땜질하는 처방이었다.

 

독일 노동자운동의 주류는 오랜 세월 누적된 노사 협조주의 흐름 속에서 이런 제안을 무기력하게 수용했다. 자본가들의 위기탈출 프로그램을 완성하는 충실한 부속품으로 기능한 것이다. 서울시가 기대하는 노동자들의 주인‘의식’이란 이런 것이다. 이런 노동이사제를 더욱 확대하는 게 문재인의 공약이기도 하다.

 

 

 


 

박원순이 칭송하는 독일 사례 : 공동결정제도

 

 

 

박원순 시장은 자신의 프로젝트를 준비하면서 독일 사례를 열심히 벤치마킹하고 있다. 독일의 공동결정제도 같은 기구가 작동하는 걸 보며 적잖이 감동받은 듯하다.

 

1976년 도입된 독일 공동결정제도는 노동자 5인 이상 일하는 기업에 직장평의회 설치를 의무화하고, 노동자들이 위원을 선출해 이사회에 참여시키는 방식이다. 독일의 공동결정제도를 칭송하는 사람들은 이런 제도 덕분에 독일이 1990년대의 경제적 정체상태에서 탈출하고 2008년 발발한 세계경제위기 상황에서도 해고를 최소화하며 효과적으로 대처할 수 있다고 말한다.

 

 

양보교섭의 보편화

 

하지만 폴크스바겐의 아우토 5000 프로그램이 보여주듯이, 공동결정제도를 바탕으로 이뤄지는 조치들은 자본가의 이윤을 위해 노동자의 권리를 삭감하는 것들이다.

 

대표적으로 박근혜가 자신의 노동개악을 추진하는 데에서 ‘귀감’으로 삼았다는 독일의 하르츠개혁이 관철되는 데에서 공동결정제도는 노동자의 처지를 악화하는 발판 노릇을 했을 뿐이다. 실업문제에 대처하기 위한 방안으로 2003년부터 3년간 추진된 하르츠개혁으로 독일의 500만 실업자 숫자가 200만 명 수준으로 줄었다. 수치상으로만 본다면 아주 성공적인 ‘개혁’이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해고에 관한 규제, 파견노동에 관한 규제가 완화됐고, 미니잡이라고 불린 시간제 일자리가 대폭 늘어났다. 미니잡은 한 달에 400~450유로(52~58만 원) 정도를 받는 저임금 일자리다. 그런 미니잡 일자리가 2015년 기준으로 800만 개까지 늘어났다. 게다가 실업급여 수급기간도 기존 최대 32개월에서 18개월로 단축됐다. 그러다 보니 통계상 실업률이 완화됐다는 현상과 달리, 독일사회의 빈부격차 수준은 오히려 더 악화됐다. 지금껏 필요성이 제기되지 않았던 최저임금제가 도입됐다는 사실이 이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점점 약해지는 노동조합

 

더 중요한 사실은, 노동조합의 반발을 거스르면서 독일 연방정부가 이를 강행했다는 점이다. 오랜 기간 공동결정제도가 작동하면서 노동조건에 관한 중요한 사안들이 이 기구를 통해 처리되고, 공동결정제도의 관장 범위가 넓어질수록 노동조합의 독립적인 존재 가치는 희미해졌다.

 

시간이 지날수록 노동조합 조직률이 떨어졌을 뿐만 아니라, 노동조합의 전투성과 독립성, 행동력을 마비시키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해온 게 바로 공동결정제도다.

 

하르츠개혁 같은 중요한 개악조치가 강행되는 상황에서 기층 노동자들은 거듭 시위에 나섰지만, 노동조합 공식지도부는 끝가지 체제의 포로로 남았다. 한국의 노동자들은 박원순 같은 세력이 퍼뜨리는 독일 공동결정제도의 신화가 아니라, 결국 독일 노동자들도 거센 시위와 파업에 나서야만 했다는 사실에 더 주목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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